통감관저터 역사

통감관저터

조선통감부는 일제가 을사늑약을 체결한 후 조선을 빼앗을 목적으로 남산자락에 설치한 총독부의 전신입니다.

1910년 8월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 통감은 남산의 통감관저에서 한일강제병합을 체결했습니다.

그리고 8월 29일 일왕과 순종의 조서가 공포됨으로써 조선왕조 519년, 대한제국 14년 만에 조선은 망하게 되었습니다.

조선통감부는 그 후 조선총독부로 이름이 바뀌고, 1926년 광화문으로 옮길 때까지 그 자리에서 악랄한 식민지 정책을 펼쳤습니다.

지금도 이곳에는 당시의 치욕의 역사를 지켜본 400년 넘는 두 그루의 고목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통감관저 예전 모습

통감관저터 현재 모습

통감관저터 비석

통감관저터 전경

하야시 곤스케

일본 외교관. 1887년 도쿄 제국대학 법과를 졸업. 외무성에 들어가 1889년(고종 26년) 우리나라 인천주재 부영사. 1890년 영사. 본부 통상 국장을 거쳐 1899년 주한공사로 재차 부임했다.

그 후 7년간 재직 중 한국에서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고 일본세력을 심는데 온 힘을 기울였고,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한일의정서’를 성립시킨데 이어 그해 8월 ‘한일협약’을 체결하고, 이듬해인 1905년 ‘을사조약(2차한일협약)’을 체결하는 등 일본의 침략 야욕을 위한 앞잡이로 날뛰어 본국에서 이름을 떨쳤다. 그 공으로 1906년 남작이 되고, 이어 주이,주중,주영 대사를 거쳐 1934년 추밀원 고문을 지냈다.

거꾸로 세운 동상

조선 침찰의 상징 하야시 동상 좌대 판석의 글자 ‘남작하야시곤스케상’ 중 ‘조’자의 좌변과 ‘군’자의 ‘입 구’ 부분이 깨진 채 2006년 8월 3일 발견되었다. 하야시 곤스케는 한일의정서, 을사늑약, 한일협약 체결 등에 깊숙이 관여한 조선 침략의 원흉으로 문제의 동상은 1936년 그의 업적을 기념해 통감관저 앞 뜰에 세워졌었다.

서울시는 9년간 보관하고 있던 동상의 잔해들을 모아 표석을 만들었다. 동시에 국가적인 치욕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동상을 거꾸로 설치하기로 결정, 당일 서울시 중구 예장동 2-1(옛 통감관저터)에서 일반에 공개되었다.

-2015년 8월 22일 KBS뉴스